결혼을 앞두고 왜 내가 매번 죄인이 되는 걸까요?
상대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히려 내가 사과하고 있다면,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내 기억과 판단을 흔들어 책임을 뒤집는 가스라이팅이 반복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결혼을 앞둔 관계라면 더욱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해요.
결혼식을 두 달 앞둔 30대 여성 서연은 파혼을 고민하다가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상담을 받으러 갔어요. 서연은 예비 신랑이 다른 여성과 연락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서운한 마음에 이유를 물었지만, 남자친구는 오히려 화를 냈어요.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 내가 결혼할 사람은 너야. 일 때문에 연락할 수밖에 없는 거 이해 못 해?”
서연이 잘못된 행동을 지적할수록 남자친구는 서연의 의심과 성격을 문제 삼았어요. 결국 서연은 남자친구의 행동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했다며 사과했어요.
이런 일이 반복되자 서연은 자신이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행복하기보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시간이 더 많아졌죠.
가스라이팅은 일반적인 연인 간의 다툼과 무엇이 다를까요?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기억과 감정, 현실 판단을 반복적으로 부정해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이에요. 중요한 차이는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이 아니라 상대의 판단 능력 자체를 공격한다는 점이에요.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철학과 케이트 에이브럼슨(Kate Abramson) 교수는 2014년 발표한 연구에서 가스라이팅을 상대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 판단을 정당하게 형성할 능력조차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행위로 분석했어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심리학 연구진인 윌리스 클라인(Willis Klein) 등은 2023년 가스라이팅 피해 경험을 보고한 65명의 연애 경험을 분석했어요. 연구에서는 상대를 비이성적이라고 몰아가거나, 책임을 뒤집거나, 자기 판단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들이 관찰됐어요.
특히 가스라이팅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보다 상대의 평가를 더 신뢰하게 되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렇다면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은 평소 어떤 말들을 사용할까요?
첫째,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라고 반복해요.
과거에 했던 말이나 약속을 반복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상대의 기억에 대한 확신을 흔드는 대표적인 가스라이팅 전술이에요. 처음에는 사건 하나를 의심하게 만들지만, 반복되면 자기 기억력 전체를 의심하게 될 수 있어요.
이스라엘 예즈릴밸리칼리지의 오하드 스젭세올(Ohad Szepsenwol) 교수 등이 참여한 2024년 연구에서는 연인 관계의 가스라이팅을 측정하는 검사를 개발했어요. 여기에는 상대가 과거 발언을 부인하거나, 함께 겪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의심하게 만드는 행동이 포함돼요.
예를 들어 결혼 후 생활비를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했는데, 남자친구가 갑자기 “나는 그런 약속 한 적 없어. 네가 혼자 착각한 거야”라고 말하는 상황이에요.
물론 사람마다 기억이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문자나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조차 계속 부정하면서 상대의 기억력을 공격한다면 그저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는 문제를 넘어서 가스라이팅일 가능성이 높아요.
다툼의 쟁점이 약속을 지켰는지에서 내가 기억력이 나쁜 사람인지로 바뀌기 때문이에요.
둘째, “너는 너무 예민해”라는 말이 왜 위험할까요?
상대의 감정을 계속 과민반응이나 정신적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정당한 문제 제기를 무력화하는 방식이에요. 피해자는 무엇 때문에 상처 받았는지 설명하기보다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사실부터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돼요.
클라인과 동료들이 분석한 65명의 피해 경험에서는 가스라이터들이 상대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거나 예민한 사람이라고 비난 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견됐어요.
예를 들어 서연이 “다른 여성과 몰래 연락한 게 상처였어”라고 말했을 때, 남자친구가 “보통 여자들은 이 정도로 안 그래. 너는 정신적으로 너무 불안정해”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대화의 중심은 남자친구의 행동에서 서연의 감정 상태로 이동해요. 처음에는 남자친구의 행동이 문제였는데, 싸우다보면 서연의 감정이 문제인 것으로 이야기가 전환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서연은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조차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감정 표현이 언제나 옳은 판단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감정이 타당한지 논의하는 것과 감정을 느낀 사람 자체를 비정상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분명히 달라요.
셋째, “너는 혼자 판단하면 안 돼”라는 말은 왜 조심해야 할까요?
상대의 판단력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은 스스로 결정할 자신감을 떨어뜨릴 수 있어요. 특히 도움과 비난이 함께 제공되면 상대방은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의존하게 될 수 있어요.
캐나다 맥길대학교의 제니퍼 바츠(Jennifer Bartz) 교수 등이 참여한 2026년 이론 연구는 가까운 관계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과 현실 판단을 확인 받는다는 점에 주목했어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반복해서 나의 판단력을 의심하면 영향이 커질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남자친구가 “너는 돈 관리도 못 하고, 사람 보는 눈도 없잖아. 결혼 준비는 그냥 내가 결정할게”라고 말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든든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혼식 비용이나 신혼집 계약처럼 중요한 문제조차 혼자 결정하기 두려워질 수 있어요.
건강한 도움은 상대의 판단 능력을 키워주지만, 가스라이팅에 사용되는 도움은 상대가 스스로 결정할 힘을 잃게 만들어요.
넷째,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라는 말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상대의 행동 탓으로 돌리는 책임 전가는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히려 사과하게 만드는 방식이에요.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누가 죄책감을 떠안을지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에요.
클라인 등의 2023년 연구에서도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상대에게 잘못을 돌리는 패턴이 관찰됐어요. 연구진은 이를 대화의 방향을 뒤집는 전술과 연결해 설명했어요.
예를 들어 남자친구가 거짓말을 했는데 서연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네가 맨날 의심하니까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서연은 처음에는 거짓말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남자친구를 거짓말하게 만든 사람인지 고민하게 돼요.
이런 대화가 반복되면 남자친구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고, 서연은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어요.
다섯째, “네 친구들은 우리 관계를 몰라. 나만 믿어”라는 말은 왜 위험할까요?
가족과 친구의 조언을 무조건 부정하며 자신만 믿도록 요구하는 것은 상대가 독립적으로 현실을 확인할 기회를 줄이는 통제 행동이에요. 고립이 기억 부정이나 책임전가와 결합하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어요.
2019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하던 사회학자 페이지 스위트(Paige Sweet)는 가스라이팅이 개인 간의 말싸움만이 아니라 관계 안의 권력 차이를 이용해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어요.
예를 들어, 서연이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친구가 “네 친구들은 너를 질투해서 우리 결혼을 망치려는 거야”라고 말하는 상황이에요.
서연은 점점 친구에게 고민을 말하기 어려워져요. 남자친구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확인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다만 가족이나 친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만으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상대의 외부 관계를 반복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의 판단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지예요.
가스라이팅을 오래 경험하면 실제로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요?
가스라이팅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고 우울감이 높아지거나 관계 만족도가 낮아질 수 있어요.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 연인 관계를 조사한 연구에서도 확인된 연관성이에요.
스젭세올 교수 등이 참여한 2024년 연구는 이스라엘 성인 509명과 미국 성인 395명, 총 904명을 조사했어요.
이스라엘 표본에서 가스라이팅 노출 정도와 우울 증상의 상관 관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고 미국 표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어요. 즉 가스라이팅 경험이 많다고 보고할수록 우울 증상도 높고, 관계의 질은 낮은 경향이 있었어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얼마나 화려한 말로 사랑을 표현하느냐가 아니에요. 그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내가 나를 더 신뢰하게 되는지, 아니면 점점 의심하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에요.
이런 말을 반복하는 사람과 정말 파혼해도 될까요?
파혼 여부는 상대에게 가스라이터라는 이름을 붙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동과 책임 인정, 변화 가능성, 그리고 관계의 안전성을 살펴 판단해야 해요. 결혼을 약속했다고 해서 자기 판단과 안전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한두 번의 기억 차이나 감정적인 말만으로 가스라이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상대가 명백한 사실을 반복적으로 부정하고,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오히려 나를 비난하며, 사과한 뒤에도 같은 행동을 계속한다면 결혼을 재고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가능하다면 중요한 대화와 약속을 기록하고, 믿을 수 있는 제삼자나 전문 상담가와 함께 상황을 검토해보세요. 결혼 준비를 잠시 중단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에요. 협박이나 보복이 우려된다면 혼자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안전을 먼저 확보해야 해요. 판단이 어렵다면 상대 가스라이팅 검사를 통해 관계를 점검해보는 것도 좋아요.
꼭 기억하게요. 건강한 사랑은 의견이 달라도 서로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가스라이팅은 상대가 자기 판단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결혼은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나의 미래를 맡기는 일이 아니에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면 적어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존중하며 함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해요.
참고문헌
Abramson, K. (2014). Turning up the lights on gaslighting. Philosophical Perspectives, 28(1), 1–30. https://doi.org/10.1111/phpe.12046
Klein, W., Li, S., & Wood, S. (2023). A qualitative analysis of gaslighting in romantic relationships. Personal Relationships, 30(4), 1316–1340. https://doi.org/10.1111/pere.12510
Klein, W., Wood, S., & Bartz, J. A. (2026). A theoretical framework for studying the phenomenon of gaslighting.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Review, 30(2), 195–215. https://doi.org/10.1177/10888683251342291
Sweet, P. L. (2019). The sociology of gaslighting.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84(5), 851–875. https://doi.org/10.1177/0003122419874843
Tager-Shafrir, T., Szepsenwol, O., Dvir, M., & Zamir, O. (2024). The gaslighting relationship exposure inventory: Reliability and validity in two cultures.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 Relationships, 41(10), 3123–3146. https://doi.org/10.1177/02654075241266942


